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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 신춘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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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28  22: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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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40여 년 전의 나는 그 집에 있었다. 그때는 의료 보험도 없었고 특수 계층을 빼고는 모두가 어렵게 지내는 때라,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갈 수가 없었다. 웬만큼 아픈 것은 참아냈고, 더 이상은 참을 수 없게 됐을 때서야 약국 문을 두드렸다. 약국도 서울이나 큰 도시에 있을 뿐 이였고, 작은 도시에는 약국이 아닌 약방이나 약포가 드문드문 있었다. 지금은 아무리 오지라고 해도 약포나, 약방은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더구나 보건소가 각처에 있어서 저렴한 비용으로 치료를 받을 수도 있고 거동이 불편한 환자에게는 방문 치료도 하여준다. Tv에서 보건소 의료진들이 방문 치료를 하여 주는 것을 볼 때,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나는 참으로 좋은 세상에 살고 있구나 하며, 아팠던 지난날을 되새김질하게 됐다.

사업을 하셨던 아버지는 사업 실패 후 서울 변두리에 작은 약국을 내셨다. 직원을 수 십 명 두셨던 아버지가, 약국 아저씨가 되어 박카스 한 병, 활명수 한 병, 사가는 손님에게 “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하며 고개 숙여 인사하시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때 눈물이 났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의 약 처방이 잘 듣는다는 입소문이 나서 손님이 무척 많았다.  단골손님이 많아졌고 고질병도 깨끗이 치료됐다면서 인사 오는 사람도 있었고 소문 듣고 멀리 부산에서까지 아버지를 찾아왔다. 아버지의 부도로 하여 방 한 칸의 셋집도 구할 수 없었는데, 불과 1년 만에 방 3칸짜리 집을 사서 이사했다. 좁은 가게 방에서 궁핍하게 살다가 나 혼자만의 방도 가지게 됐고 마당에는 덩굴장미도 올렸다. 그 집으로 만족했어야 했는데 사람의 욕심은 멈출 줄을 몰랐다. 약국은 더욱 손님이 많아지고 따라서 돈 두 싸여갔다. 아버지는 어려웠을 때를 생각해서였는지 먹는 것 입는 것을 아껴가며 돈을 모았다.

아버지 바지 길이는 언제나 짧았다. 바지 끝이 닳아 헤지면 안으로 접어 올려 입으셨다. 사계절 바지가 아니고 두 계절 것만 있었다. 박카스 한 병 선뜻 마시지 않고, 하루 4~5시간 잠자며 일요일도 없이 일하셨다. 말죽거리가 개발될 것을 예감하셨는지 어떤 집을 가서 살펴보라고 하여 엄마하고 버스를 갈아타며 고생고생해서 찾아갔었다. 70년대 이전만 해도 말죽거리는 말 그대로 말이 죽 먹고 쉬어 가는 곳이었다.. 아버지가 일러준 집을 찾아갔는데 어느 양반의 저택이었다는데 99칸 기와집에 대문이 4개나 됐다. 지금 민속촌 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집인데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 귀신 나오기에 충분할 것만 같았다. 엄마랑 나는 질겁을 하고 그 집에서 뛰쳐 나와 그 먼 곳까지 그런 집을

보고 오라는 심부름을 시킨 아버지를 원망했다. 속 좁은 여자들인 우리는 아버지의 혜안을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 집 상태를 보라는 것 이 아니고 땅을 보라던 것이었는데 말이다. 99칸의 집을 둘러싸고 있는 땅은 아파트 한두 동은 올릴 수 있을 법 했는데  말이다. 아버지는 약국을 비울 수가 없기에 아내와 딸이 손사래를 치니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그 대신 집을 늘여 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방이 다섯 개에 부엌이 세 개인 집으로 이사했다. 집을 계약하기 전에 부동산 아저씨를 따라 처음 갔을 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남향집이고 단층이지만 높여지었기에 밝고 시원했고 넓은 마당은 하늘을 온통 들여놓은 것처럼 화사했는데 어째서 음침한 기분이 들었었는지를 오래 지나지 않아 불행스러운 일을 겪으며 알게 됐다. 넓은 집에 젊고 다정하신 부모님, 대박 터진 약국집에 무남독녀인 나는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지내는 꽃 피는 봄날이었다.

그 행복이 익숙해질 무렵 무너지는 징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동내 반장도 아니면서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녔던 엄마는 혈압으로 쓰러지더니 심장판막으로 집과 병원을 오가게 되였다. 행복은 가고 불행이 시작된 것인데, 불행이란 놈은 떼를 지어 온다고 했던가? 그날도 엄마를 대학병원에 입원시켜 드리고 집에 왔는데 나의 한쪽 다리가 펴지지 않았다. 일하는 언니가 아버지에게 달려가 약을 받아와 먹었지만 점점 더해져만 갔다. 이유도, 병명도 모른채 그저 엄마 때문에 피로가 쌓여서 그런가 보다 하며 하루 이틀을 보냈다. 조금 지나니 펴지지 않는 것은 물론 퉁퉁 붓기 시작했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셨던 아버지에 의해 대학병원에 입원을 했다. 진단 결과는 파상풍이라고 하며 어쩌면 다리를잘라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외동딸의 다리를잘라야 한다는 말에 기막혀 하시다가 친구가 운영하는 병원으로. 데리고 가셨다. 친구 병원은 승강기가 없어서 아버지가 나를 직접 업고 4층까지 올라갔다. 나는 등에 업혀서 다리가 아프다며 아우성을 쳤는데, 그때는 좌절과 공포가 뒤섞인 아버지의 얼굴을 미처 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뚜렷하게 기억난다. 그 병원에서 치료가 잘 되여 내 두 다리는 튼튼하게 달려 있기에 60 넘은 나이에도 너 댓 정거장은 걸어서 다니고 있다. 그때 아버지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내는 심장병으로 병원을 오가고, 딸은 파상풍으로 누워있고, 수발을 들던 식모 언니는 엄마 패물을 들고 도망가 버렸다.

약국에서 아무리 돈이 많이 들어와도 나가는 것이 많았고, 더구나 희망이 없다고 좌절하신 아버지는 모든 의욕을 잃고 쓰러지셨다. 병원으로 실려가신 아버지는 유언 한 마디 없이 3일 만에 떠나셨다. 집에는 남편이 죽었어도 통곡 한번 하지 못하는 병든 아내와 치료도 다 끝나지 못한  딸이 남았다. 징그러운 것이 삶이라고 했던가? 그런 지경에서도 꾸역꾸역 살아야 했는데 아버지 떠나고 한 달 만에 엄마도 따라가셨다. 그래도 나는 꺽꺽 거리며 살았다. 죽음만큼이나 고통스러웠지만 아프다는 엄살도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 같아, 눈물도 감췄다.

어느 날 혼자 있는 내가 걱정되어 이모할머니가 오셨는데 유명하다는 무속인도 함께 왔다. 나는 따로 종교는 없었지만 무속인은 꺼려 했었다. 하지만 할머니를 거역할 수가 없어 듣고 있었는데 그 무속인의 말이 우리 집의 불행이 그 집에서 비롯됐다며 말 문을 열었다. 한마디로 우리 가족이 죽을 곳으로 찾아 들었다고 하였다. 삼 살 오방이라고 했던가? 그렇다고 그 집이 누구에게나 죽음을 부르는 집은 아니고 우리가 먼저 살았던 집에서 그 집이 죽음의 방향이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집에 처음 들어섰을 때의 뭔지 모를 불길한 느낌이 생각났다. 그래서였던가?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어쩌면 이모할머니가 그 무속인을 데리고 오면서 우리 집 사정을 말했을지도 모른다. 눈치 빠른 무속인이 그것을 놓치지 않았겠지만 듣고 나니 무서워서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사실 그때 나는 모든 것을 다 잃은 상태였는데 그 지경에서도 두려움이 남았었으니 삶의 욕심이었을까? 나는 아버지가 바지단을 접어 입으시며 절약하고 힘들여 장만한 집을 아주 헐값에 팔아 버렸다. 그리고는 먼지 하나까지 털어버리고 그 집을 떠나버렸다. 떠나고 40여 년간 그 집을 잊고 살았다. 아니 그 집에다 나의 모든 추억을 묻어놓고 왔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어느 사이 나도 모르는 내 기억 깊은 곳에서 울고 있었다. 잊고 싶고 잊어야 살 수 있는데, 내 부모와 행복을 빼앗아간 그 집이,,, 흉가라고 무섭다 했던 그 집이 추억의 되새김 질을 부추기고 있다. ,” 그 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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