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낯선 커피숍에서 46년 전을 회상하고 있다.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살면서도 강산이 서너 번씩이나 바뀌는 동안 한 번도 밟아 본 적이 없는 땅에 와 있다.

이곳은 내 부모와 내 삶을 앗아간 곳이다.

너무 아파서 너무 서러워서 나는 이곳을 잊어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잘못 타게 된 버스 때문에 이곳으로 들어섰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상처투성이인 이곳 이름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나는 뭔지 모를 슬픔에 떨렸다.

, 답십리,

그래, 답십리에 잃어버린 모든 것이 있었다.

아니 잊을 수 없었던 시간이 있었다. 그래, 그래, 그렇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이정표에는, 답십리,라고 적혀있었다.

45년 전, 제약회사를 경영하셨던 아버지의 부도로 인하여 제기동을 버리고 답십리로 이사했다.

변변한 가구 하나 없이 가난의 극치점에서 아내와 딸을 이끌고 답십리로 옮겨 새롭게 둥지를 틀었다.

그때 그곳은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가난한 마을이었다.

버스 종점 근처에 방 한 칸이 딸린 가게를 세 얻어 아버지는 약국을 내셨다. 약국 앞으로는 더러운 물이 흐르는 개천이 있었고 판잣집이 줄지어 있었다.

모든 것이 모자라고 부족했던 시절이라 죽을 만큼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아버지의 약국을 찾아 들었다.

단벌옷을 약값 대신으로 들고 오는 사람도 있었고 결혼반지라며 은가락지를 신문지에 싸서 들고 오기도 했다.

하늘이 내려앉을 만큼 아파도 그때의 가난한 사람들은 참아냈다.

배가 아프면 활명수를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하였고 어떤 엄마는 삼 대 독자에게, 원기소 한통 먹게 하기 위하여 긴 머리카락을 잘라 팔기도 하였다.

원기소가 무슨 맛일까 하여 먹어봤는데 콩을 볶아놓은 것 같은 맛이었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며 잘못 타게 된 버스에서 내려 36년 전의 흔적을 찾으러 바쁘게 휘젓고 다녔다.

그때에는 볼 수 없었던 높은 건물들이 하늘로 뻗쳐 있다.

더럽고 사연 많은 개천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갖가지 색깔의 자동차들이 넓은 길을 달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약국은 큰 길가에 있었기에 찾을 수 있으리란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바람난 강아지 모양 왔다 갔다 하였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서운한 마음으로 살림집을 찾아 나선 얼마 후 그곳이었을 것 같은 곳에서 5층짜리 원룸 건물을 만났다. 회색 빛깔의 건물 덩어리를 눈 흘기며 뒤로하고 다시 큰 길로 나왔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실력 있는 약사님으로 꽤나 유명하셨었다 그렇지만 심장판막으로 고생하시는 엄마의 병은 고치지 못하시고 괴로워하시다가 마음의 병을 감당치 못하고 진달래꽃이 떨어지던 날 세상을 영영 떠나셨다.

아버지가 떠나셨어도 통곡소리마저 낼 수 없는 엄마가 병이 들어 있었고, 나이 스물다섯의 철없는 딸이 있었다. 아버지가 떠나시자 외가 식구들이 들짐승들처럼 달려들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에도 다섯 명의 외삼촌들은 아버지의 힘든 짐 이였고 분노의 대상이었다.

엄마는 남편 모르게 큰 외삼촌과 작은 외삼촌들에게 주고 또 주었지만 외삼촌들의 가난은 그대로였고 주면 줄수록 더 많은 것을 원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남겨주신 유산을 엄마 앞으로 상속해야 한다며 무섭게 했다. 내가 아직 결혼 전이니까 엄마 앞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사실 나는 그때 유산이고 상속이고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외삼촌들은 아버지 묘에 흙이 마르기도 전에 난리를 치고 있었다.

상속 문제로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람이 나와 녹취도 하고 서명도 하는데 엄마는 딸인 내 앞으로 모두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스물다섯 살에 집 두 채와 광주에 과수원을 소유한 상속녀가 되었다. 외삼촌들의 반발은 하늘이라도 뚫을 기세였다.

외삼촌들의 생각에는 조카 앞으로 있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누이 앞으로 되어있으면 빼앗아 가기가 쉽다는 생각이었나 보다, 아버지가 떠나신 지 불과 한 달 만에 엄마도 아버지를 따라가셨다.

아버지 묘에 풀도 자라지 않았을 텐데 그런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홀로 남을 딸에게 잘 있으란 말도 남기지 못하고 그냥 꿈처럼 떠나셨다. 아버지 곁에 엄마를 두고 내려왔는데 누군가가 말하기를 죽은 사람은 죽었어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밥을 먹으라고 하였다. 나는 그 말에 착한 아이처럼 국에 밥 한 그릇을 쏟아붓고 마구 퍼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니 가족이라고는 일하는 사람하고 마당에 매어져 있는 강아지 두 마리뿐이었다. 내가 울어도 눈물 닦아줄 사람이 없다는 현실에 울지 않고 잠을 잤다. 다음날 큰 외삼촌과 둘째 삼촌이 와서 나하고 함께 살자고 했다. 나를 서로 차지하겠다고 두 삼촌이 큰 소리로 다투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두 사람만 남겨두고 집을 나섰다.

골목길을 나오는데 이웃집 아줌마들이, 천지 약국집 딸, 가엾어서,,, 하며 눈물 닦는 시늉을 했다. 나는 나를 불쌍하다고 말하는 것이 싫어서 나를 모르는 사람들 속으로 갔다. 갔던 것은 생각이 나는데 눈을 뜨고 보니 처음 보는 약국의 긴 의자에 눕혀져 있었다. 나이 든 여약사가 물컵을 쥐여주며 괜찮으냐고 물었는데, 부끄럽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여 도망치듯 약국에서 나왔다. 내가 길에 쓰러져 있다고 해도 달려와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죽음보다도 더욱 슬펐다.

집에 돌아오니 강아지 두 녀석이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고 있었다. 그 녀석들을 무시하고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겹쳐 쓰고 통곡하였다. 얼마 동안을 울고 있을 때 친구가 찾아왔고 운명의 남자도 함께 왔다. 나는 그에게 미친 청혼을 하고 말았다. 혼자라는 것이 무섭고 서러웠기에 가족이 필요했으니까. 그와 결혼하고 그곳이 싫어서 떠났으니 36년 전이었다 떠난 그 후에는 한 번도 갔던 일 이 없었는데 실수로 가게 됐던 것이다.

나는 약국 자리였을 것 같은 곳에 작은 찻집에 들어가 창가를 차지하고 앉았다. 늙은 아줌마가 창가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르고 버티고 앉아있는 것 을 주인은 따가운 눈길을 보낸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식어버린 커피를 한 방울 한 방울씩 혀끝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랬다.

슬픈 것도 괴로운 것도 내 삶이었다.

어느 것 하나 선택할 수 없다면 피하지 않고 자주 찾아와야겠다.

그곳에는 내 아버지와 엄마가 있고 반갑다고 꼬리치던 강아지 두 녀석이 있었다.

그리고 마당 한가득 하늘을 쓸어안고 있던 내 집이 있고,

추억과 함께 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