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시골집에 살 때 우리 집에 빨간 플라스틱 껍질에 싸여있던 미제 제니쯔 진공관 라지오가 있었습니다.

라지오를 켜면 즉시 소리가 나오는 게 아니고 우우웅 소리가 한참 나고 나서야 지지직거리며 소리가 납니다.

그 라지오는 소리도 우렁차서 우체부 아저씨가 가끔 들리시다가 "너의 집 전축 샀냐?" 하시기도 했습니다.

아침 일찍 아버지가 작은 소리로 켜놓고 어머니와 정담을 나누시던 그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시그널 소리가 나중 알고 보니 '페르겐트의 조곡' '아침'이었습니다.

어떨 땐 '미국의 소리' 뉴스를 이광재 아나운선가 하는 분이 또렷하게 소식을 전해 주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러던 라지오가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나오면서부터 찬밥이 되었습니다.

값도 쌌고 가볍고 후라시약만 넣으면 어디든지 들고 다니면서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던 중 어떤 일로 떨어져 플라스틱 껍질이 금이 가고 소리도 코먹은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당시 아버지가 쌀 한 가마 값으로 사 오신 라지오는 기억과 함께 사라져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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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진공관 특유의 부드럽고 따스한 소리는 트랜지스터라디오가 흉내조차 낼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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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나 나도 나일 먹었고 당시 흔히 말하는 오디오에 입문했지만 그저 트랜지스터 세상에서만 기웃거릴 뿐 진공관의 세계에는 발도 딛지 못했습니다.

그놈의 세상이 끝도 없는 세상이라 난 작은 스피커나 싼 가격의 앰프 등으로 만족하면서도 꿈을 버리지 못했는데, 내게도 시련이 닥쳐 스피커나 앰프 등이 제 역할도 못하면서 방 한구석으로 쳐박혔고 오디오에 오짜도 못 꺼내고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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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며칠 전 아주 저렴한 중국제 진공관 앰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름신이 강림하셔서 카드를 긁었습니다.

며칠을 기다리니 도착했는데 이게 110볼트 형 플러그라 인터넷으로 220형 연결 플러그를 주문하고 도착하고 난후 어제서야 조심스럽게 헤드폰으로 작동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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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으로 날 되돌려 놨습니다.

그 부드러운 음색이며 따스함이란 비록 값싼 헤드폰으로 들어야 하는 처지지만 배가 불어옵니다.

그리곤 당장 헤드폰부터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인터넷을 뒤지다가 높은 가격에 포기하며 그래 이만도 행복하니 자족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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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집에 있는 스피커를 꺼내 와야 하는데 아내에겐 무슨 거짓말을 해야 하나?

그리고 걔도 20여 년을 틀어박혀 있었는데 소린 날까?

별의별 걱정이 앞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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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브가 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바라보면서 왜 예전 생각들이 떠오를까요?

진공관은 내게 고향 같은 존재입니다.

거기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이 예전 그대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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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서야 한마디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두 분 사랑합니다."

살아생전 한 번도 못 해본 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