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73년의 12월 이였다.

우리는 여고 동창으로 자칭 오공주 였다.

여고 내내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고 졸업 후에는 진학한 친구와 취업한 사람으로 나눠졌지만 한 달에 한 번씩은 종로 금란 다방에서 모임을 갖고 우정을 확인하며 지냈었다.

만나면 고궁 나드리나 무교동 낙지를 먹으러 다니거나 명동 골목을 누비며 새로 사귄 남자친구 이야기로 해지는 줄 몰랐었다.

여고 졸업 후 1~2년 때까지는 대화의 중심은 취업한 친구는 직장 상사에 대한 것이고 진학한 사람은 동아리 이야기나 여고 때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바닷물만큼이나 마르지 않고 계속됐다.

나는 진학도 취업도 하지 못했기에 이야깃거리도 없었기에 한심하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여고 때는 한 미모에 한 관심받았던 것 같은데 현실에서 밀려나고 보니 스스로를 낙오자라는 생각을 하며 지내고 있던 그 해 12월에 사건이 일어났다.

대학에 진학한 친구가 모 대학 철학과 학생들 과의 크리스마스 미팅을 마련했다.

그들은 군 제대한 복학생들 이였는데 우리 오공주하고 짝을 맞춰 금란 다방에서 만나기로 했다.

하늘 높이 X 마스 캐럴이 넘쳐났고 별빛보다 더 반짝이는 가로수 트리가 행인들의 마음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사흘 밤낮으로 엄마를 졸라서 얻어낸 판탈롱 바지에 호피무늬 코트의 깃을 세우고 다방으로 들어섰다.

여고 시절 내내 귀밑 2.5센티였던 머리카락 길이의 한이라도 풀려는 듯 우리 오공주의 머리카락은 어깨에서 찰랑거렸다.

내 머리는 반 곱슬이라서 특별한 외출 때에는 미용실에 들려 용돈을 투자해야 했다.

쪽 뻗은 생머리에 적당히 큰 키, 마르지도 살찌지도 않은 내 외모에 나는 때때로 감탄을 하곤 했는데 40여 년이 지난 요즘에는 거울 속에 비친 끔찍한 내 모습에 놀라서 눈을 감을 때가 많다.

다방 문을 열고 들어서니 주선한 친구 말고는 벌써 나와 있었다.

때가 때이니 만큼 다방 안은 젊은이들로 들썩였다.

우리 옆 테이블에도 너 댓 명의 남자들이 떠들며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그때는 금연 구역이 따로 없었고 다방이나 식당에서는 탁자에 재털이가 당연히 놓여 있었다.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당당히 담배를 피울 수 있었기에 지금의 애연가들은 그때를 부러워할 것 같다.

비록 합법적으로 피울 수 있었지만 쉬지 않고 줄 담배를 피우는 그들 때문에 우리는 숨조차 쉴 수 없을 지경이 됐다.

겨울이라 창문을 열어 놓지도 못하고 구석에서 돌아가고 있는 환풍기 뿐이었다.

연탄난로의 가스 냄새와 담배연기 그리고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들 역시 목소리를 높여가며 수다를 떨다가 지쳐갈 무렵 옆 남자들과 싸움이 붙었다.

“아저씨들, 담배 좀 그만 피우시면 안돼요? 계속 피니까 우리가 질식할 것만 같아요.

“뭐라고? 아저씨? 이 아가씨들이 우릴 보고 아저씨란다.

따끈따끈한 오빠들 보고 아저씨라니 아줌마들 눈에는 우리가 아저씨로 보입니까?

“뭐 라 고? 아줌마?,,, 줄 담배만 피우는 줄 알았지 개념까지 없는 줄 몰랐네요."

여고 때 내내 규율 부원이었던 나와 전교 1등이었던 친구까지 합세해서 오빠가 아닌 아저씨들과 전쟁을 했다.

그 사람들 중에서 경상도 말을 쓰는 남자가 제일 목소리도 컸고 행동도 상스러웠다.

그 남자가 우리를 칠 것 같다는 공포가 느껴져서 나는 친구 뒤로 숨었다.

형제자매가 없이 자라서 였는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겁이 많다.

지금도 형체 없는 귀신에서부터 길에서 모르는 사람이 싸우는 것을 봐도 무서워 멀리 돌아서 지나치는 것을 보면 내가 많이 모자라는 사람 같기도 한다

그런 나를 되짚어 생각해보니 6.25 전쟁 중에 태어나 전쟁을 온몸으로 겪었던 탓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혼자서 웃기도 했다.

얼굴이 새하얀 남자가 경상도 남자를 끌다시피 데리고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나니 다른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떨떠름한 모습으로 문 쪽을 쳐다보고 있었고 우리들도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에 두 남자가 돌아왔고 그들이 허리 굽혀 사과를 하였기에 우리들도 교양 있는 몸짓으로 인사를 나눴다.

자리를 옮길 형편도 아니었기에 그들과 우리들의 어색한 동거가 계속됐는데 나는 그때 속으로 “내가 결혼을 한다면 절대로 경상도 남자 하고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을 했다.

하지만 세상 일이라는 게 맘먹은대로되지 않으니 다음 해에 또 다른 경상도 남자하고 결혼을 했으니 땅속에 누울 때 까진 자신하지 말라고 했던 선조님들의 말이 생각난다.

우리들이 어설픈 화해를 하고 차 대접을 받으며 어설픈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주선자 친구가 왔다.

오다가 버스에 소매치기 사건 때문에 경찰서까지 갔다가 오느라고 늦었다며 미안해 했다.

“어! 어떻게 알고 함께 모인 거야?

겨울바람에 볼이 빨갛게 물든 친구가 우리와 함께 있는 남자들을 번갈아 보며 하는 말이었다.

사실을 알고 보니 오늘의 만남 당사자들이 그들였으니 기막힌 첫 만남이었다.

그런 악연으로 시작된 12월의 만남은 악연으로 계속됐다.

며칠 뒤에 문제의 경상도 학생 자취방에서 X 마스 파티를 하는데 온갖 진상을 다 겪었다.

무슨 진상이었냐 하면 우연을 가장해서 정전이 되고, 맥주에 소주 타서 양푼에 담아 돌려 마시기 벌칙으로 포옹하기 등 그런 저런 잡다한 것들을 하면서 긴 겨울밤을 더욱더 길게 보냈다.

그래도 명문대 학생들이고 군에까지 다녀온 학생들 이였기에 그 정도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주선했던 친구 체면을 봐서 꾹 참았다.

누가 일부러 짝을 지우지 않았는데도 짝이 지어졌는데 어이없게도 내 짝은 그 경상도 남자였다.

얼굴이 새하얗던 남자였다면 그래도 괜찮았을 것 같았는데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수 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눈살을 찌프리게 한다.

그들과의 만남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왔던 어느 날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우리 집은 버스 종점 근처에 있었는데 버스에서 내려섰는데 낯익은 얼굴이 앞을 가로막았다.

문제의 경상도 학생이었다.

만남을 주선했던 친구를 들볶아 내가 살고 있는 동내를 알아내고 기다렸던 것이었다.

그들과의 만남이 그날로 끝이라고 잊어가고 있었기에 그의 출연은 어이없었다.

길에 서서 이야기를 나눌 수 없기에 근처 빵집으로 들어가 빵과 우유를 시켜놓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는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 사귀자고 했다.

당연히 나는 싫다고 하였는데 그는 우유 컵을 들었다 놨다 하며 협박을 했다.

자기와 사귀지 않으면 컵을 깨서 내 얼굴을 그어 버리겠다고 하였다.

나는 엄청난 겁쟁이로 작은 일에도 기절할 정도로 바보스러웠다.

그랬는데 그날에는 너무도 엄청난 일을 당해서 였는지 무섭지도 않았다.

“ 맘대로 해요, 당신 같은 사람과 사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났겠네요. 하고 말해 버렸다.

나의 당돌할 것 같은 대꾸에 오히려 그가 당황했는지 우유가 들어있는 유리컵을 벽에 던져 버리고는 뭐라고 독설을 퍼 붙고는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가고 나니 그때부터 사정없이 떨렸다.

빵집 주인의 부축을 받고 겨우 집으로 돌아와 보름 동안 죽을 만큼 알아 누웠다.

그래도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는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니 그래도 고맙고 다행스러웠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니고 다혈질인 경상도 사나이의 표현 방법이었던 것 같다.

그 후 또 다른 경상도 남자를 만나 살면서 보니 서울 여자하고 경상도 남자는 다른 면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별로 크지도 않은 우리나라인데 살았던 마을이 다르다고 생각과 행동이 각기 다르다는 것이 조금은 신기하다는 생각이다.

그때 그 경상도 남자는 어떤 여자의 남편이 되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헛 웃음이 나온다.

그날 깨진 컵에 내 얼굴이 그어졌다면 오늘 이렇듯 미소 지으며 글을 적지는 못하리라.

추억이란 것은 참으로 미묘해서 아팠던 사연들도 무지개 꽃을 피워 주는가 보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면, 내 젊은 날들이 꿈틀거려 늙어가는 가슴에 뜨거운 눈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