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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로 남은 착 한 일 - 신춘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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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8.09  08:4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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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로 남은 착 한 일'

집에서 서울 방학동까지 가려면 2시간도 더 소요된다.

서울 시민으로 70년을 살다 화성 시민이 되었을 때 많은 것이 익숙지 않아서 우울하기도 하였고 외롭기도 하였지만,

적응에 귀재인 인간의 능력으로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집은 역세권, 숲세권, 먹세권과는 거리가 멀어도 무지하게 멀어서 속도 상하고 부동산 말에 의지했던 나의 무능함에 속상했다..

모든 게 무식하고 꼼꼼하지 못한 내 탓이라고 위로하며, 이제는 어느 정도 현실 적용을 하고 있기는 하다.

몇 년 전, 어느 날

갑자기 내 삶에 위기가 찾아왔는데 아침에 일어났는데 종아리에 쇠 말뚝을 박혀 있는 듯. 엄청난 통증과 걸을 수가 없게 되였다.

그전에도 자다가 다리에 쥐가 나서 코에 침도 바르고 주무르기는 하였지만얼마 지나면 풀렸기에 그날도 그런 줄 알고 주무르고 코가 침에 빠질 듯 발라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행스럽게 집에서 가까운 곳에 병원이 있어, 진찰을 받게 됐는데척추 4.5번 협착이라고 하였다.

건강한 편이 였고 , 척추 건강에 신경 쓰던 나는 의자에 앉았을 때 항상 바른 자세를 지켰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것도 이미 많이 진행된 상태라며 의사선생님은 겁을 주셨고 더 황당한 것은 협착은 완치가 되지 않으니까

수술까지 가지 않으려면 체중 줄이고 운동하고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잘 따르라는 것이었다.

워낙 겁이 많은 나는 의사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주사도 맞고 약도 잘 복용하고 물리치료도 거르지 않고 16일을 다녔지만 전혀 나아지지가 않았다.

나의 삶이 66살에서 끝난다고 생각하니 눈물만 났다.

내 하늘이 온통 먹구름 속이던 어느 날 여고 친구 아들이 생각났다.

여고 때 그 친구와 나는 단짝이었는데 그 친구는 19등 이였고 나는 13등 이였으니 내가 공부는 조금 더 잘했지만 친구의 아들은 내 딸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기에샘이 났었다.

친구 아들은 서울 공대를 졸업하고 다시 수능을 보고 한의대에 입학하여 한의원을 개원했다고 하였다.

보통 나 같은 사람은 서울 공대는 꿈에서도 꿈꿀 수 없는 영역인데, 참으로 대단한 아들인 건 분명하다.

친구 아들이 한의원 냈다는 소릴 들었을 때만 해도 내가 환자가 되어 찾을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16일을 다녔는 데도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한 나는 최후의 선택이라는 생각에 친구에게 말하고 아들 병원을 찾아갔다.

친구도 이미 병원에 와서 나를 맞이했는데 아마도 친구는 아들에게 최선을 다해 치료하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그때까지 한약은커녕 아무렇게나 보여지는 침이라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지만, 물에 빠진 놈 지푸라기라도 잡는 격으로 친구 아들에게 몸을 맡겼다.

친구 아들이지만 그래도 남자 인데 벗은 몸을 보여 주다니 좀 그랬다.

그날 누워서 생각했다

친구 아들의 의술의 깊이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는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엄마 친구에게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어느 명의가 말하였던 것이 생각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친구 아들은 나에게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믿음이 기적을 준 건지 아니면 친구 아들의 의술이 만들어 낸 기적인지 60년을 넘게 살아온 동안 한 번도 침을 맞아 본 적이 없는데, 그날 침을 맞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완치가 된 것은 아니지만 일상생활하는데 참을 만해져서 처음에는 2~.3일 걸러 치료를 받다가 좋아진 후로는 많이 아플 때 가서 벌침도 맞고 가끔은 약도 지어다 복용하며 지내고 있다.

서울 살 때는 쉽게 찾아갈 수가 있었는데 작년에 이곳으로 이사한 후로는 아주 많이 아픈 게 아니면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우리 집에서 방학동까지 가려면 2시간 반에서 3시간이 걸리는데 왕복 5시간 이상이 걸린다.

더구나 허리 다리가 많이 아플 때서야 큰 맘먹고 나서기에 고행길이 따로 없다.

집 앞에서 10여 분 간격으로 오는 버스를 타면 1호선 전철역까지 가고 그 역이출발 역과 가까워서 출퇴근 시간이 아니라면 앉을 자리가 많다

일반석에도 빈자리가 많았지만 나는 1시간 40분 동안 느긋하게 가야 하니까

그냥 경로석에 앉아 침 맞을 기운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두 눈을 감았다.

시원하다 못해 한기가 돌 정도의 피서를 즐기며 우리 집보다 더 좋다는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이런 행복과 만족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부채 하나로 여름을 나야 했던 시대에 살던 내가 이제는 에어컨을 방마다 놓고 살며 관공서, 학습장, 복지관 ,,, 모든 곳이 시원하고 따뜻해서 나는 복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디쯤 왔을까 눈을 떠 보니 전철 안은 승객으로 꽉 차있었고 내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허리가'기역 자'로 구부러진 할머니가 힘들게 서 있었다..

그때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모른 척했어야 했다.

내 나이도 70살이 넘었고, 더구나 나는 아파서 병원 가는 길인데,그 몸으로 착한 일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불치병인 내 오지랖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아파 보니까 다른 사람의아픔을 공감해서 였던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 말았다.

“ 저 어 이리 오세요? 여기 앉으세요”

하고 불렀더니 굽은 허리로 한 걸음에 달려와 앉으셨다.

근데 다른 사람 같으면 “ 괜찮아요, 고마워요, 하는 말 한마디라도 할 것 같은데 그 할머니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냥 앉으셨다.

나는 자리 양보하고 공치사를 받길 기대했던 내가 참으로 유치하다는 생각을 하며 통증이 더해가는 허리를 손잡이에 기대서 있었다.

그렇게 서 있던 중 나에게 자리 양보 받은 할머니 옆자리가 비기에 그 자리로 가서 앉으려는데 할머니가 자신을 짐을 놓고 앉지 못하게 하였다.

나는 앉지도 못한 채로 엉거주춤 서 있는데 할머니는 누군가를 큰 소리로 불렀다.

“ 여기 자리 있어요,,, 빨리 와요”

잠시 후 영감님인듯한 어르신이 오더니 서 있는 나를 팔로 치우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마치 내 입에 있는 사탕을 빼앗긴 아이처럼 서 있어야 했다,

그분들 곁에 더 있다가는 속으로 욕을 퍼부을 것 같아서 다른 칸으로 옮겨갔다

자리 양보하고 이렇게 속이 상한 일을 격고, 나는 마음속으로 결심한 것이 있다.

“다시는 절대로 착한 일 하지 않으리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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