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총수 9명이 국회 청문회에 나왔다. 그러나 청문회장에 선 재벌 총수들은 모르겠다는 말 뿐이었다. 진심어린 반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미 드러날 만큼 드러난 시점에서 일말의 양심을 기대했던 국민은 총수들의 뻔뻔한 대답을 듣고 말문이 막혔다. 대통령은 끝까지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우기고 재벌들은 입을 맞춘 듯 모르겠다고 하니 기가 막힌 일이다.이미 확인된 정황만 놓고 봐도 재벌 총수들이 모르쇠로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니다. 삼성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위해 국민연금까지 동원된 지원의혹을 받고 있다. 그런 삼성이 재단에 거액을 기부하고 이와 별도로 정유라를 위해서 100억을 썼다. 이런 행위가 이재용 부회장의 지배구조 공고화를 위해 특혜를 지원받은 것과 별개라는 주장을 하려면 ‘모르겠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정도의 말로는 한참 부족하다.
재벌 총수들의 요청사항이 청와대에 전달된 정황은 이미 확인된 터이다. 그리고 대통령과 재벌 총수들의 독대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이 있었건 없었건 그 직후 재벌들은 줄지어 돈을 냈다. 이렇게 정황이 명백한데 대가성이 없다고 말한다면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재벌 총수들이 피해자 흉내를 내는 것은 더 기막힌 일이다. 그들은 이미 편법의 수혜자들이며, 이 불공정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한 공범들이다. 박근혜 정권이 국민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여온 친재벌 정책이 이들의 로비와 압력과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은 소가 웃을 일이다. 국회 청문회장에 나온 재벌 2세들은 하나같이 편법을 통해서 거대한 부를 힘 안들이고 물려받은 자들이다.
당장 총수의 사법처리만 피하면 된다는 생각은 무척 안이한 판단이다. 재벌 총수들이 청문회에서 보인 태도는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죄를 끝까지 부인하는 대통령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파렴치한 거짓말의 결과가 어떠한지는 지금의 성난 민심이 보여주고 있다.
전경련 없앤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사법처리를 피한다고 끝날 일도 아니다. 재벌 총수들은 이미 5공 비리 청문회 뒤에도 머리를 조아렸었지만 바뀐 게 없었다. 차떼기 사건 뒤에도 그대로였다.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는 일은 근본적인 재벌개혁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동안 어느 모로 봐도 비정상인 재벌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항상 있었지만 그때마다 재벌들은 ‘경제’를 핑계로 내세웠고, 정치권의 비호를 받으며 한 번도 개혁의 대상이 된 적이 없다.
바로 그 재벌이 사유화된 권력과 만났을 때 경제는 물론이고 국가 전체를 파탄 낸 것이 이번 사건의 본질이다. 재벌을 그대로 두고, 정경유착의 고리를 내버려 두고서는 언제든 제2의 최순실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이번 사건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