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 박박 밀은 머리로 날 위로해줬다.
아니 우리들을 위로해줬다.

우린 집안 대대로 대머리였고 군대를 다녀오면서부터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는데 총각귀신이 될뻔했다.
선은 볼 때마다 퇴짜였고, 동료 여직원들의 관심 밖의 남자였다.
상사들은 시원해서 좋겠다곤 했지만 이건 놀림일 뿐이고 동료 여직원들도 날 쳐다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는 동정의 눈길이었다.
머리에 약도 바르고 유명하다는 머리털 난다는 병원에도 찾았다.
며칠 바르면 기운이 하나도 없는 머리칼이 나오기도 했지만 약만 끊으면 당장 효과가 나타났다.
거기다가 그 약이 남자에겐 안 좋다는 소문도 있고 해서 포기했다.
한 번은 용하다는 대머리 전문병원에 가 봤는데 원장이 대머리여서 치료를 포기했다.
날 장가를 보내려고 시골에 계시는 어머니께서 꼬깃꼬깃 쌈짓돈을 들고 오셔서 가발을 권했지만, 어머니 비유를 맞춰드리려고 계실 때만 쓰고 벗어버렸다.
특히 땀이 나는 여름에 어머니가 오시면 곤욕이었다.
가발과 피부 사이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라도 하면 짜증이 더해갔다.
나이가 사십이 다가가자 나도 초조해졌다.
최근 선을 본 여자는 나이는 들었지만 다행히도 무척 여성스러운 그런 여자였다.
안경을 쓴 자욱이 남아있는 얼굴로 나타났는데 배시시 웃을 땐 하얀 이빨이 돋보이는 매력이 있는 다소곳한 여자였다.
난 가발을 쓰고 계속해 그녀를 만났고 결혼 프러포즈에 성공했다.
요즘은 흔해빠진 해외 신혼여행이 그땐 제주도만 갔다 와도 와~소리가 났다.
김포공항에서 짓궂은 유부남 친구 놈들을 떼어 놓고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혼자서 별의별 상상을 다해가면서 키득키득 웃어댔다.
친구 놈 중에서 유독 학교 다닐 때부터 악동인 놈이 있었는데 밤일을 못할까 봐 대신 아들을 낳아주겠다는 말을 해 정중히 거절했다.
이놈이 어딜 넘봐 ㅋㅋㅋ
군대 있을 때 낮은 포복으로 수십 미터를 전진해간 나야 미친놈아, 못된 조교를 만나 푸시업은 수없이도 했고.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간다.
사랑하는 여인과 바라보는 황혼은 말 그대로 낭만이었다.
난 국민학교 여름 성경 반에서 나 떠올렸던 하나님을 찾았다.
"주님 정녕 이것이 꿈은 아니겠지요. 땡큐 오마이 갓"
영어가 우리말은 아니니 하나님께도 내 뜻을 전해 지리라

호텔에 도착해 가이드가 곧 저녁식사를 하니 시각을 정해주면 양식당으로 오란다.
거기서 그날 함께 여행 온 신혼부부들이 통성명을 하며 인사를 나누고 와인도 한 잔씩 나누었다.
난 숫기가 부족함을 내 스스로가 잘 알기에 그걸 잊기 위해 몇 잔을 더 청했다.
옆에 있던 새색시가 제동을 걸었지만 처음부터 아내에게 잡혀선 안된다는 친구 놈들의 금과옥조도 있고 해서 난 개폼을 잡으며 양주도 한 병 더 시켰다.
주변의 신혼부부들이 부러움 반 질시 반의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고 거기까지만 기억이 났다.



새벽이 되었을 땐 가 금속성의 비명소리에 깨어났다.
내 새색시가 침대 벽 쪽에서 이불을 부여잡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게 아닌가.
새 색신 신랑은 간곳없고 웬 영감탱이가 자신의 옆자리에 누워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난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속이려고 한뜻은 없었고 그저 당신이 좋아서 ..... 말을 하려고 했지만 기회도 없었고 용기도 나지 않아서..... 그리고 오늘 첫날밤만 치르고 나면 네가 어쩔 건데 하는 심보도 있었다.
그런데 어제 그놈의 양주가 웬수다.
첫날밤은 고사하고 식당 가기 전 갈아입은 평상복 차림 그대로 누워있다 깨어난 꼬라지며  내 가발은 침대 옆 바닥에 뒹글르고 있었다.
잠결에 거추장스런 가발을 나도 모르게 던져버린 것이었다.

난 정말 그녀를 좋아했다.
장가를 가서 남들처럼 잘 살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대머리도 장가를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대머리를 빼면 남보다 못할 것도 하나도 없었다.
분노와 좌절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버진 왜, 할아버진 왜 하며 조상도 탓했다.
하지만 이 시간은 어찌하든 그녀를 내 여자로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여드레 삶은 호박에 바늘 안 들어갈듯한 그녀의 자세에 모든 걸 포기할 수밖에 없어졌다.
난 그 순간부터 벙어리 냉가슴 앓듯 했다.
이 난관을 어찌 극복해야 한단 말인가?
다시 하나님을 찾게 됐다.
오 하나님 이것만 해결된다면 교회도 나가고 감사헌금도 빼지 않겠습니다.
부처님 옥황상제님, 공자님 맹자님......

아낸 그 후로 실어증 환자처럼 말을 잃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죄인인 난 벼라 별생각을 다해봤다.
충성 맹세를 닭의 아비 다카기마사오처럼 혈서라도 써서 보여줘야 하나?
아니 난간으로 뛰어내리면 붙잡기는 할까?
호텔 방한켠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고 관광버스가 도착했으니 빨리 나오라는 가이드의 두드림에 깨어났다.
하지만 아낸 벙어리에다 돌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난 사정상 관광 일정을 포기한다고 말하고 한켠에 기대고 앉았다.
아내도 그대로였다.
우린 삼박사일 관광 일정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방에 처박혀있었다.
남들은 우리가 변강쇠와 옹녀가 만난 줄 알지만 그건 절대로 아니었다.
금식이 아닌 굶식으로 지칠 때까지 지쳐서 신혼여행 마지막 서울로 돌아가는 새벽이 왔다.
나도 이젠 모든 걸 포기해야만 했다.
아 서울로 가면 서로의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구나. 뭐 혼인신고는 안 했으니 호적은 깨끗하겠고, 뭐 전셋집의 집긴 다 빼주면 되고, 반지는 그냥 가지라고 할까?



아내가 할 말이 있다고 입을 열었다.
아 이젠 모든 게 끝이구나.
그냥 혼자 살걸 왜 결혼은 해서.....
회한이 몰아쳐왔다.

아내가 뒤돌아서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웬 덩어리를 꺼내놨다.
오잉? 이거 틀니?
아낸 배시시 웃었다.
천사였다.
나 또한 땅바닥의 가발을 들고 섰다.
우린 서로를 바라보면서 미친년처럼 웃고 울었다.